문혜진 시 옮겨 쓰보기
검은 표범 여인
낮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 프러시아의 스킨헤드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도 좋겠어
우리는 무엇이든 공모하기를 좋아했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 마음껏 놀았어 무례함을 즐기며
인스턴트 커피와 기타 선율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망칠 수있을까 골몰하며 야생의 경전을 돌려보았지
그러나 지금은 이산의 계절
우리는 춥고 쉬 지치며 더, 더, 더, 젊음를 질투하지
하지만 네가 잠든 사이 나는 허물을 벗고 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벨트를 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사로잡힌 자의 눈빛으로 검은 표범의 거처에 스며들 거야
단단한 근육을 덮은 윤기 흐르는 검은 벨벳, 흑단의 전율이 폭발할 때까지 이제 동굴보다 깊은 잠을 자야지
도마뱀자리 운명, 진짜 내 목소리를 들려줄까?
북극 흰 올빼미
그 바다의 모든 의혹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소녀의 눈을 기억한다면
외계에서 이탈한 빛
오로라를 만날 수 있지
창백한 은발에 깊은 초록 눈을 가진
그런 소녀 말이야
흰올빼미의 정적이 흐르는 이마
부유하는 빙하의 고독이 잠시 머문 콧날
달싹일 때마다 깊은 사이프러스 향이 나는 차가운 입술
그 소녀를 만난다면
가장 추운 나라의 빙판 위에서 맨발로 춤출 거야
대지의 집착을 견디지 못해 불출하는 간헐천
빙하를 삼킨 유황 온천의 넘치는 열기
춤을 추다 녹아내릴 거야
증발할 거야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의 여행
나는 물이 아니지
얼음이 아니야
나는 설인도 아니지
눈보라 속에서 발끝을 세우고 춤추는 나는
이탈한 자의 폭포
정지 비행하는 매
재가 섞인 빙산의 에테르
새벽 3시
넉뢰에 영혼이 이탕한 흰올빼미
홍어
내 몸 한가운데 불명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시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 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밤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야생의 책
젖을 물린다
방심한 짐승의 눈빛으로
달큰한 젖내에 겨워
가장 작고 예민한 입술의 애무를 받으며
나는 꽃피우는 기계
이성이 마비된 울창한 책
한 번도 읽지 못한
아무도 펼치지 못한 무한한 페이지
인류 문명의 근원보다 위대한
생명의 발상지
육덕한 젖줄기가
골짜기를 타고 대지에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월식의 완전한 어둠과 늑대 울음소리
나의 침대는 암흑의 시간을 잉태한 채
흐르고 흘러
어디에서나 머물고
아무 곳에도 없다
게르에서 잠을 깬 아침
젖을 빨며 울고 있는 너는
내 아들인가 아비인가
야생 커피 한 잔과 마유주 한 모금은
순록의 뿔처럼 단단했던 몸을 녹여 주었고
차가운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즙액
백야의 자궁 같은 뭉근한 백일몽
북극여우는 만년설에 할례를 마쳤고
생장이 멈춘 채 눈 속에 묻혔다
사막은 내부의 허무를 확장해
푸른 이파리의 나무들을 산 제물로 삼켰고
첫 발정이 마지막 발정이 되는 순간
산란하지 못한 물고기의
부유하는 정액이
물속을 혼미하게 했으나
아무도 멈추는 법을 몰랐다
태양의 주기에 생체리듬이 맞추어진 이뉴이트의 발작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태양의 사제가 된다
우거지는 순록의 뿔
때가 되면 떨어져 나가는 비늘
생장점이 극에 달했을 때
우주는 스스로 반복한다
순환의 리듬이
세상의 경전을 살찌우는 동안
몸속 유전자의 기억은
피를 흘리며 날고기를 씹는다
무성한 육체의 시간
방심한 두발짐승의 풀어헤쳐진 몸을 더듬는
작은 포유류 한 마리
내 발끔치를 덥석 문다
시베리아의 밤
어디 너의 무용담을 한번 펼쳐 보시지 보드카만 축내지 말고 취하면 고, 고, 고르바초프로 시작되는 그 말더듬이가 거슬리지만 우데게 마을 이야기 좀 해 봐 진짜 호랑이를 보긴 한 거야? 호랑이 사냥꾼이자 제사장인 와샤 그의 러시아 백마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퍼마신 이야기 말고 진짜 시베리아 이야기를 들려줘
시베리아 아--- 긴 폭설을 뚫고 지나가는 육중한 열차 타이가 숲에서 필요한 건 한 개비의 성냥과 총알 한 방, 나에게 필요한 건 창백한 러시아 영계의 불타는 계곡주 지루함에 불 지르는 네버 엔딩 스토리 놀고 있네 더 취하기 전에 썰 좀 품어 봐!
호랑이의 배설물과 흔적이 있는 길목에 땅굴을 파고 나무 위에 위장막을 짓지 100킬로미터 펼쳐진 광활한 그의 영역에서 일 년을 기다렸어 영하 20도의 혹한, 이빨은 썩어 들어가고 관절은 옹관 속 미라가 다 됐지 길목 여기저기에 무인 카메라를 장착하고 호랑이를 기다리는 거야 냄새를 피우지 않기 위해 페트병에 오줌을 싸고 똥은 비닐에 묶어 두었다 교대할 때 버리지 통조림과 곡물 말린 씨앗과 열매로 배를 채우고, 백 가지가 넘는 바람 소리에 귀를 열어
그롷게 모니터만 주시하기를 수개월, 러시아 예술사와 만화택이 공무원 시험 눈제 풀이집이 될 즈음 온몸의 감각을 세우고 바람 소리에 귀가 발기된 새벽, 깜빡 졸다가 오줌이 마려워 깼는데 모니터에 뭐가 휙 지나가는 거야 너구리겠지 하는 순간 헉! 암흑 속에서 푸르게 빛난 안광 원격 감지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며 커다랗고 느릿한 무언가가 슬금슬금 다가왔지 왕대였어
왕대가? 빡 돌아 버린 거야 예민한 코가 아미 모든 냄새를 맡은 후였어 놈은 위장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주저 없이 앞발로 카메라 렌즈를 툭 내리쳤어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지 쫌팽이! 렌즈가 박살 나고 그다음은 내 차례잖아 이상한 쾌감이 밀려왔어 왕대와 마주한 그 절대의 공포와 위엄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 호랑이는 카메라를 다 부수고 위장막 쪽으로 다가와 내 손등에 수염을 스윽 스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
동대문운동장 세르게이라는 고려인의 술집, 너는 홀린 눈빛으로 보드카에 양고기 꼬치를 씹으며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 채 자주 중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삶이 네가 진짜 원하던 인생이었다고, 매혹의 대가는 그토록 쓰고 달콤하며 그 발자국 끝에는 정말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가 있었다고, 푸카초바인지 조까부까인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오랜 유배생활에 폭삭 삭아 내린 이 사이로 담배를 끼워 물고 도넛을 만드는 너는 묘기의 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