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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의 경우

바위처럼구름 2017. 4. 10. 09:49

밀랍의 경우


나희덕


밀랍은 더 이상 희지 않고

향기롭지 않으며

손으로 만지거나 두드릴 수 없다


어떤 불길이 밀랍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밀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카시아꽃 향기, 벌들의 날갯소리, 햇살과 바람,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다


뜨거운 밀랍은

이제 어디로든 흘러내릴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다


한 자루의 초가 되거나

한 조각의 비누가 되거나

한 사람의 밀랍인형이 되거나

밀랍은 서서히 굳어가며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곧 녹거나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