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랍의 경우
나희덕
밀랍은 더 이상 희지 않고
향기롭지 않으며
손으로 만지거나 두드릴 수 없다
어떤 불길이 밀랍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밀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카시아꽃 향기, 벌들의 날갯소리, 햇살과 바람,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다
뜨거운 밀랍은
이제 어디로든 흘러내릴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다
한 자루의 초가 되거나
한 조각의 비누가 되거나
한 사람의 밀랍인형이 되거나
밀랍은 서서히 굳어가며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곧 녹거나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