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
오세영
백지는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
백지에 글을 쓴다.
흰 포말을 남기며 바다를 긋는 그의 항해.
선수는 미지의 대륙을 향했다.
그것은 신이 쓰는 한 줄의
서사시.
그러나 항상 평온한 바다만은 아니다.
미구에 폭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일고
난파 직전.....
간신히 무인도에 표류해 닻을 내리는
퀘스천마크.
또 백지에 글을 쓴다.
쟁기로
빈 들판 가로지른 한 이랑의 향기.
뿌리는 씨앗은 강 건너 별빛들이다.
그것은 신이 쓰는 한 줄의
서정시.
그러나
항상 온화한 대지만은 아니다.
미구에 눈보라 몰아치고 무서리 내리고
간신히 거둔 몇 리터의 보리와
밀의 피어리어드.
백지는 원고지만이 아닌 것.
시 또한 시인만이 쓰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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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 습작에 귀감이 될만한 시다.
처녀지의 제목에서 시작하여 바다를 백지로 보고 배가 펜이 된다.
그리고 대지를 백지로 보고 쟁기가 글 쓰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시이다. 간결하면서도 상상력 비유력 환치가 포함된 시다
두 연으로 나누어도 무방할듯한데 시인은 나누지 않았다.
12행부터 2연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시인이 있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