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모음

처녀지

바위처럼구름 2013. 8. 24. 21:41

처녀지

오세영

백지는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

백지에 글을 쓴다.

흰 포말을 남기며 바다를 긋는 그의 항해.

선수는 미지의 대륙을 향했다.

그것은 신이 쓰는 한 줄의

서사시.

그러나 항상 평온한 바다만은 아니다.

미구에 폭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일고

난파 직전.....

간신히 무인도에 표류해 닻을 내리는

퀘스천마크.

또 백지에 글을 쓴다.

쟁기로

빈 들판 가로지른 한 이랑의 향기.

뿌리는 씨앗은 강 건너 별빛들이다.

그것은 신이 쓰는 한 줄의

서정시.

그러나

항상 온화한 대지만은 아니다.

미구에 눈보라 몰아치고 무서리 내리고

간신히 거둔 몇 리터의 보리와

밀의 피어리어드.

백지는 원고지만이 아닌 것.

시 또한 시인만이 쓰는 것은 아니다.

........................................................................

단평: 습작에 귀감이 될만한 시다.

처녀지의 제목에서 시작하여 바다를 백지로 보고 배가 펜이 된다.

그리고 대지를 백지로 보고 쟁기가 글 쓰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시이다. 간결하면서도 상상력 비유력 환치가 포함된 시다

두 연으로 나누어도 무방할듯한데 시인은 나누지 않았다.

12행부터 2연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시인이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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