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능소화(凌霄花)라는 이름을 알려준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녀를 그리워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은 시간의 무게와 지금 마주할
수 없게 되었거나 아련히 아쉬움으로 남은 탓일 것이다.
구중궁궐에서나 피어난 사연을 전해 들었던 당시에는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사정이라고 여겼지만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겪는 그 허한 가슴속에 아픈 흔적은 이해 할 수 있었던것 같다.
이제는 동네에서 지나는 길목마다 연주홍빛 능소화가 많은 줄 알아 차린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기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그런 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대할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게 하고야 만다.
우리 동네 축대 위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 둘레로는 해 높은 여름날 소풍 나온 어린애 마냥
상그럽게 고개 내밀고 있다. 그래서 지나며 반가워 한다. 하지만 마냥 기다림의 여름을 지나고
내 가슴 아파하는 동백마냥 땅에 흩뿌려진 마음들은 가슴 아프게 한다
내게 꽃의 이름과 함께 사연으로 더해져 그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똑바로 본 건
어느 늦은 밤 거나한 몸짓으로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향하던 부슬부슬 여름비가 한창인
갑작스럽게 다가 온 이별을 통고 받던 날이었다.
작은 손을 내미는 담쟁이도 있었지만 고개를 빼고서는 마냥 기다리고 있는 품이
나도 저런데 하는 묘한 기분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여름을 지나며 담쟁이는 손도 굵어지고 도발하는 기세도 거세어져 담벼락을 휘둘러 장악하고
그 옆에 선 모퉁이로 누군가 반갑게 맞이할 이 기다리는 능소화는 항상 목이 길다.
그렇게 능소화는 내게 와버렸다.
난 성은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그 어떤 성은을 고대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순간 다가온 그의 손 잡음으로 인해 내내 가슴 깊이 맺혀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해두자
울리지 않는 전화기는 내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연의 색은
붉은 정염은 시간이 남기고 간 바람에 탈색되어가고 만다.
내 몸으로 받아들인다 하여 지탱하기 버거운 기다림은
벽을 타는 담쟁이의 불온에 기대어 높이 높이 고개를 빼어든다.
붉디붉은 입술은 기다림에 메말라 주홍으로 탈색되고 만다.
태양을 따라가지 않는다
심장에 난 틈으로 다 쏟아낸 열망은 빈혈로 쓰러져 버릴 듯이 담쟁이에 기댄다.
여린 담쟁이의 의지에 맘을 기댄다.
잊지 않기로 하였기에
잃어버린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뜨거운 뙤약볕에서 고개 숙이고 선 모습에 붉은 눈물 쏟아내고 주홍의 박재로 선다
능소화가 모퉁이에서 하나 둘 떠나갔다
다만 이름으로 내게 온 그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