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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와 무의식 혁명 -진정한 나를 찾아서-(인문학 강의록 베껴 씀)

바위처럼구름 2014. 4. 24. 15:06

 

프로이트와 무의식 혁명  -진정한 나를 찾아서-  (건국대 김석교수 인문학 강의록))

 

1. 들어가는말

 

   프로이트는 이전까지 학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무의식을 과학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서구 전통에 깊이 각인된 이성 중심주의를 파열시켰다.

정신분석학은 억압되고 망각되었지만 끊임없이 의식을 뒤흔드는 무의식을 마음의 본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기원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폴 리쾨르는 해석의 갈등에서 욕망, 충동, 의지 같은 신체의 '선행성, anteriorite'을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을 '주체의 고고학, archelogie du sujet'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현상학을 주창한 미셸 앙리는 정신분석학의 계보학에서 정신분석학은 표상성의 근저에 놓인 존재의 본질, 즉 잃어버린 기원을 찾는 새로운 존재론이라고 말한다.

 미셸 앙리가 말하는 기원은 존재의 근본 토대이자 이성주의가 배척해 온 뿌리인 몸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논리적 일관성을 강조하는 이성의 논리를 뒤집고 억압된 것을 끄집어내면서 존재의 진리를 전혀 새로운 토양 위에 세운다는 점에서 사유의 대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과 의식 대신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와 논리에 대해 무의미와 역설의 전리를, 합리성과 선의 윤리 대신 단절과 토스의 미학을 말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은 정신의 구조를 근본적인 분열과 갈등에서 찾으면서 삶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정신분석학은 플라톤 이래 서구사상을 지배해 온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전복이자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을 잇는 세 번째 인간학 혁명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몇 가지 핵심 이론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인간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가 사유의 지평에 도입한 무의식 혁명의 이론사적 의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메타심리학의 세 전제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작동 법칙과 심리구조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정신기구 모델, psychic apparatus'을 구상하면서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자신의 이론을 메타 심리학이라 불렀다.  

메타심리학은 의식현상 너머에 있는 무의식을 탐구대상으로 삼는 정신분석학의 또 다른 이름으로 프로이트의 문제의식을잘 보여 준다.

    이 용어는 물리학 너머에서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한(메타피직)을 연상시킨다. 

무의식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메타심리학 이야말로 오랫동안 철학이 지탱해 온 마음과 의식의 동일성 논리를 프로이트가 전복하고자 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메타심리학의 세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형성, topography'으로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하였다.

    지형성은 정신 내부가 상이한 역할을 담당하는 세 심급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작용하면서 일정한 관계 속에서속에서 통일된 구조를 형성한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처음으로 1차 정신기구 모델을 제시하면서 무의식, 전의식, 의식을, 그리고 1920년대 사유의 대전환 이후 새로 구상한 2차 모델에서 이드, 자아, 초자아를 정신의 실체로 제시했다. 

마음의 역동성이나 리비도 경제학은 '장소'를 고려하는 지형학적 관점을 고려할 때 잘 이해할 수 있다. 

심리적 장소는 해부학적 영역이 아니라 행동과 표상을 상이하게 관장하는 기능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프로이트는 지형성을 은유가 아니라 정신의 실제로 간주한다.

 

 둘째 '경제성, economy'의 논리로 리비도 경제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심리 과정을 에너지의 분학과 증감을 통해 설명하면서 일정 수준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항상성, homeostasis'원리가 기본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리비도는 대상에 상이한 강도와 방식으로 투여되면서 쾌와 불쾌의 자극을 준다. 

에너지 흐름에서 일정량의 에너지를 서로 나누고 상호 작용하면서 적정한 쾌락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양적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프로이트는 경제성 논리를 도입한다.

경제성의 관점을 보면 프로이트가 19세기 물리학과 생리학의 기본 원리에 기반을 둔 심리 구조 모델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 관점은 프로이트가 인간 마음을 지나치게 역학적으로 설명하려 한 한계를 잘 보여주며, 이후 라캉처럼 인문학적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의 과학화를 새롭게 시도한 사람들에 의해 수정된다

 

셋째 '역동성, dynamic'의 논리다.

  역동성이란 일정한 장소를 점유한 심리기구들이 만족을 추구하며 에너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타협하면서 정신기제를 무한한 갈등과 욕망의 전장으로 내몬다는 생각이다. 

정신기구가 대립된 힘의 고갈되지 않는 투쟁 속에서 역동성을 발휘한다는 생각은 이미 니체가 개진했지만 프로이트는 이것을 정신의 분열논리와 충동 이원론 개념을 통해 더 구체화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어떤 신체적 결함이나 유전적 원인이 아니라 심급들 간의 필연적인 분쟁으로 설명함으로써 신경증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 구조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전통 정신의학과 완전히 구별되는 프로이트의 입장이다. 

특히 역동성의 논리는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뚫고 스스로를 드러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욕망은 주체의 선험적 능력이 아니라 상이한 힘들의 충돌 속에서 충동과 결합하면서 주체의 선험적 능력이 아니라 상이한 힘들의 충돌 속에서 충동과 결합하면서 구체화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마음도 고정된 관찰 대상이 아니라 욕망과 충동의 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구체화해나가는 변화무쌍한 존재이다.

 

  메타심리학은 이처럼 세 지 교리를 통해 구체화되면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으로부터 차별화 시켜준다.

프로이트는 메타심리학이 "정신생활을 충동력과 저지력의 상호 작용으로 환원시키는 역동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3. 정신기구의 세 심급

  프로이트는 1923년 발표한 '자아와 이드'에서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대폭 수정하여 2차 정신기구  모델을 새롭게 제안하지만 1차 모델의 중요한 점들을 통합하면서 좀 더 역동적 차원에서 인간 마음을 설명한다.

1차 모델이 기억 흔적에 남은 무의식적 소망이 의식의 검열을 뚫고 일상의 다양한 차원에서 현재화되는 무의식의 서술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차 모델에서는 이드로부터 발원하는 에너지의 역동적 힘과 '충동, drive'의 역할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1차 모델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완충적 작용을 했던 전의식 기능이 자아와 초자아에 전가되면서도 이 두 심급의 상당 부분이 무의식에 속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프로이트가 최초에 자기 보전 충동과 성적 충동을 대립시켰다면 후기에는 자기 보존 충동을 성적 충동에 포함시키면서 삶의 충동과 죽음 충동으로 충동이원론의 강조점을 변경시킨다.

 

 1) 우리 마음의 뿌리 이드

 '이드, id'란 최초로 우리 인격을 형성하는 마음의 뿌리로 충동과 억압된 욕망의 근원이자 에너지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이드는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원초적인 차원으로 프로이트는 이를 정신의 본래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드'를 생물학적 본능이나 호르몬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거나 혹은 존 로트가 가정하듯 완전 "백지상태, tabula rasa"에서 출발해 후육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분명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이고 생물학적 요소가 잠재해 있지만 그것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억압되면서 비로소 충동의 형태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은 단순히 과거의 망각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일치, 즉 '사후성, natraglikeit'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드는 언제나 정신 기제의 핵심으로 절대 길들여지지 않으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아와 대립한다.

또 하나 중요한 구분은 '무의식, unconsciousness'과 '이드,id'의 차이다.

무의식이 억압된 충동의 표상들을 그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면 이드는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에너지 자체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죽음 충동은 이드에 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무의식이 아니며 성적 욕구나 도착 속에서 드러날 때 무의식의 양상을 띤다.

자아와 초자아는 이드로부터 분화되며 이드가 그 원천이라면 무의식은 심급들 간 상호작용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드는 내적, 외적 자극으로부터 발생하는 흥분을 방출하려는 쾌락원리의 지재를 받으며 방해물 없이 가장 빠른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하려는 일차 과정에 충실하다.

꿈의 표상이나 환상의 원천이 되는 것이 이드다. 특히 공격성과 성적 충동은 이드에서 기인한다.

 

2) 현실의 대변자 자아

   '자아, ego'는 사회화 과정에서 현실과 접촉하면서 여러 제약과 요구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드로부터 분화된 심급이다.

우리는 자아를 소유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자아가 언어와 이미지를 동원해 인간의 고유한 현실 세계를 창조한다.   

프로이트가 1차 정신 기구 모델에서는 성 에너지의 역동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면서 외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방어와 억압을 담당하는 심급으로 자아 개념화한다. 

이드가 쾌락의 직접적이고 무한한 만족을 추구하는 근본열정에 가깝다면 자아는 이드를 조절하고 통제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쾌락원리를 추구한다

자아는 이성과 상식을 대표하며 현실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자아가 현실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은 자아가 외부 세계의 대변자처럼 이드를 감시한다는 말이다.

반면 다음에 보게 될 초자아는 내부 세계의 대변자로서 도덕적 심급을 형성하면서 자아와 이드를 감시하고 공격한다.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에서 주목할 것은 자아가 성적 쾌감의 두 원천인 신체와 외부 대상의 구별이 생기면서 신체 이미지를 수용하여 2차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선험적이고 고정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체가 자아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자아는 언제나 이미지를 매개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착각이 발생할 수 있다.

자아가 신체 이미지를 수용하는 과정을 프로이트는 동일시라고 부르는데 이때 이미지가 이상화되면서 이것이 자아정체성의 심리적 기초가 된다.

여기서 동일시는 이상화된 자아 이미지에 대한 매료와 전취의 상태를 말하는데 정신분석학은 이를 '나르시시즘, NARCISSISM'이라 부른다.

자아가 나르시시즘을 통해 형성되고 유지된다면 자아가 실체라는 생각은 부정되고 여러 변화의 가능성이 더 강조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자아의 성격이나 기질이 계속 바뀌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르시시즘 이론은 흔히 심리학에서 많이 강조하는 자아 중심의 여러 오류들의 원천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또 하나 주목한 것은 자아가 억압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자아의 근본 목적은 현실 원리를 통해 쾌락 원리를 안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이다.

자아는 이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우회적 방식으로 이드의 만족을 도와주며 때로 자극의 만족을 연기시키거나 사고와 상징화를 통해 좀 더 고차적인 쾌락을 증기면서 리비도를 발산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지각, 기억, 사고와 판단 등 고차적인 정신 기능을 담당하는 심급임을 인정하지만 이것이 기본적으로 쾌락 원리를 보충하는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충동의 성적 본질을 고수한다.

또 자아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적이라고 봄으로써 무의식이 애 의식보다 본질적인가를 부각시킨다. 자아 내에 분열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언젠 상반되고 모순된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나중에 라캉은 이를 주체분열이론으로 발전시킨다.

 

3) 도덕과 양심의 담지자 초자아

'초자아, SUPEREGO'는 인간이 왜 도덕적 감정을 갖고 끊임없이 신경증을 비롯한 증상에 시달리는지 그 원인을 잘 납득시켜 주며 무의식이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게 해 준다.

초자아는 자아에 대한 검열과 판단을 담당하고 양심의 형태로 금지와 처벌을 강제한다.

이드의 욕구에 대해서도 초자아는 마찬가지 심판관 역할을 하는데 자아가 현실 원리를 내세운다면 초자아는 이상성과 도덕의 기준을 잣대로 삼는다.

그러나 초자아는 도덕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이드의 공격성을 정당화시켜주기도 한다.

초자아는 남근기에 경험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가 해소될 때 부모로부터 오는 금지를 내면화하여 형성되면 자아로부터 분화된다.

아이에게 부모는 닮아야 할 모델이자 권위를 갖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데 이러한 부모의 두 가지 이미지를 수용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초자아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초자아는 이상적 자아와 양심이라는 두 개의 하위 체계로 이루어진다.   

이상적 자아가 나르시시즘적 열정과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면 양심은 도덕적 가치의 수호자가 된다. 일단 초자아가 자리 잡으면 이제부터 부모의 간섭이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초자아는 프로이트가 도덕과 사회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심급이다.

우리가 도덕에 지배를 받고 양심을 느낀다면 인간의 선한 본성이나 사회적 선에 대한 공리주의적 합의가 아니라 초자아로 대표되는 권위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관점이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죄책감의 두 가지 근원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첫 번째 죄책감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고, 두 번째 죄책감은 초자아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첫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도록 강요하고, 두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징벌까지도 요구한다."

  초자아가 세대를 거쳐 부모가 아이에게 전달하는 부모들의 초자아에 대한 동일시의 산물이라면 도덕의 근원에는 언제나 포기에 뒤 따르는 상실의 감정과 죄책감이 있기 마련이다.

결국 도덕의 이상성 뒤에는 타자로부터 오는 처벌에 대한 불안감과 억압된 것에 대한 동경이 갈려 있기에 우리 심리 기제는 언제나 갈등과 상호 침투 속에 놓여 잇는 것이다.

인간주체가 근본적으로 신경증적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도 초자아가 자아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4. 성적 활동의 본질인 충동

   정신분석학을 흔히 모든 것을 성적 욕망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범성록이라고 비판하지만 성적 욕망과 리비도가 왜 마음의 본질로 간주되는지의 이유는 잘 모른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성적조재라고 말하지만 언제나 '본능, instinct'이 아니라 '충동, Trieb, drive'를 통해 '성,sexuality'를 설명한다.

이때 본능, 리비도, 충동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리비도가 성적 활동과 자극에 활용되는 에너지 자체라면 충동은 유기체가 어떤 경향성을 갖도록 추동하는 상태 자체를 가리킨다.

또 충동이 유기체의 생명 유지 활동과 중첩되어 본능을 포함한 더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면 리비도는 성적 에너지에 국한된다.

하지만 언제나 리비도가 충동을 활성화시키며 리비도는 언제나 끊임없이 이동하기에 심리 기구가 역동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충동과 본능의 구분은 성 이론에서 더 중요하다.

충동은 본능과 달리 신체와 정신의 경계 개념이며 자극의 방출을 목적으로 하지만 특정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충동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발달 단계를 거치면서 구체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과 문과적 환경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게 전개된다.

몇 가지 중요한 정의를 중심으로 충동이 왜 그렇게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중요한지 보자 먼저 충동은 신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경계개념으로 어느 한쪽이 아니라 경계 자체에 속한다.

충동은 신체 자극에 그 원천이 있지만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된 형태로 드러난다.

이것은 충동의 발달 과정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구순 충동은 먹으려고 하는 식욕에서 시작되지만 입의 만족이 남긴 기억흔적이 등록되면서 이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만족의 기억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충동이 작동한다.

본능이 유기체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면 충동은 자신이 겨냥하는 표상에 따라 다양하게 대상을 동원하는 능동성을 보인다.

구순 행동은 젖가슴, 손가락, 담배처럼 입과 직접 관계있는 물리적 대상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소유욕이나 수다 같은 형태로도 발휘된다.

항문 충동도 배출 경험 자체와 규율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청결에 대한 강박증이나 금전적 인색함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이것은 충동이 최초 만족이 남긴 기억 흔적의 표상에 따라 재구성되기 때문이며 충동의 만족은 신체와 정신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

 

  다음으로 프로이트가 [충동과  그 운명]에서 서술한 것처럼 충동은 그 전개 과정에서 여러 변화 과정을 겪는다.

사랑과 미움처럼 정반대적 성향으로 전도되거나 대상이 아니라 사람에게로 전환되어 표출되기도 한다.

또 충동의 표상이 주체를 불쾌하게 만들 때 억압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형태로 승화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충동은 고정된 것도 선천적 성향도 아닌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성이 본능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특히 승화 개념은 학문, 예술, 창조적 작업처럼 고도의 지거이고 문화적인 활동이 사실은 그 뿌리를 성적 충도에 두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성적 욕망만을 위해 산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성적 충동이 영향을 받으려 리비도 에너지를 통해 활성화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학문 활동을 예로 보면 그 목적이 번식이나 성적 쾌락과 무관하지만 그 기원에서는 어떤 결여를 채우고 보다 고차원적으로 만족을 누리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다음으로 충동은 언제나 부분 충동이 형태로만 존재하면서 신체에서 외부와 내부가 연결되는 다양한 공간에 자리 잡는다.

성감대는 원래 내적, 외적 자극 교차하면서 유리체의 생명활동을 보장하는 곳으로 생식적 목적과 직접적 연관 없이 형성된다.

부분 충동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되는데 말기에 프로이트는 생명을 유지하고 통합하는 에로스 충동과 그것을 해체하고 무기체로 되돌리려는 죽음 충동으로 이원화된다고 강조한다.

죽음 충동은 완전한 긴장 제로를 지향하는 충동으로 모든 파괴적 성향의 원천이 되지만 절대적 시원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쾌락 원리의 극한이기도 하다.

리비도의 남성적 본능을 강조하는 리비도 일원론과 충동이원론은 프로이트가 죽을 때까지 고수한 원칙이다

 

 

5. 성욕의 발달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 구순기 : 애착, 의존, 공격성의 형성

   쾌감의 원천은 입. 촉각적 자극(대상을 수용)과 무는 것(공격성)이 중요 요인이 된다.

입의 주요한 작용은 1 받아들이고 2 놓치지 않으려 하고 3 깨물고 4 뱉어내고 5 다물고 한다.

입은 대상의 취사선택의 원형 "지식에 굶주렸다" 받아들이는 것은 획득욕이 원형이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끈기와 결단력의 원형이며 뱉어 내는 것은 배척과 경멸의 원형이고 입을 다무는 것은 거부와 부정의 원형이다.

구순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대상과의 관계에서 쾌감을 얻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대상관계의 원형을 이룬다 

 

2) 항문기 : 사회화의 과정이다

   배설은 긴장의 원천을 제거하여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감정적 폭발, 짜증, 분노 등 방출반응과 재물 인색함의 원형이다.

용변훈련은 어린애가 규율과 권위를 배우는 최초의 경험이다.

간섭이 매우 엄격하다면 반작용으로 무질서와 낭비, 사치, 권위에 대한 반항등의 행동이 발달하기 쉽다.

혹은 반대로 깔끔, 결벽, 질서 정연, 인색, 시간과 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절제하는 행동이 유발되기도 한다.

또한 아이에게 똥은 선물, 자선, 박애를 의미하기도 한다.

배설을 보류하는 유아의 행동은 불복종의 표현인데 똥의 의미는 아이가 느끼는 첫 번째 "선물"이기 때문이다.

 

3) 남근기 : 성차와 인격의 형성

   남근기에는 우연히 성기에서 느끼는 쾌감을 경험하며 남근기 충동의 조직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한다.

남근기는 자아 성애와 상징적 성기인 남근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인격이 형성된다.

여기서 남근은 실제 성기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남아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거세 콤플렉스를 경험하고, 여아는 반대로 남근선망의 태도 속에서 여아적인 정체성을 형성한다.

 

4) 성기기 : 성적 본능이 비로소 생식과 조응하기 시작한다

   사춘기에 급속한 신체적 발달과 함께 시작되며 성기에 리비도가 집중되지만 성적 공상보다 성행위를 통하여 만족을 추구하는 점이 남근기와 차이가 있다.

 인간에게 이성애가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3-5세경(남근기)의 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사랑과 미움의 유아적 감정에 의해 조직화되는 유아기 욕망으로 모든 무의식적 욕망의 원형으로 작용한다.

적극적 형태와 소극적 형태로 존재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은 적극적 형태로 남아가 동성인 아버지를 경쟁상대로 증오하면서 이성인 어머니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이다.

소극적 형태는 같은 성의 부모에게 애정을 느끼고 이성의 부모에게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격의 구조화와 성차의 발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상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나중에 정신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경험은 유아기 겪는 보편적 사건이지만 그 양상은 개인사와 연관되어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금지와 규율울 통해 본능을 억제하고 다스리면서 아이가 사회화되는 과정으로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설명한다.

남아와 여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행과정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남아의 오이디푸스 과정: 남근의 조직화->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발생->거세 위협->아버지에 대한 동일시->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쇠퇴->초자아 형성->잠복기     

         

여아의 오이디푸스 과정: 남근의 조직화->거세 콤플렉스->남근선망->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발생->어머니에 대한 동일시->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쇠퇴->초자아 형성성 -> 잠복기                      

 

                                                                                                                                                                                  6) 증상과 무의식적 욕망:

  정신분석학학이 무의식을 우연한 현상이나 장애가 아니라 정신의 본질로 가정하면 그것이 삶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은 다양한 인상 경험을 통해 분석된 '증상, symptom'의 중요성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의학 용어상의 제거를 목표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분석학학에서는 독특한 의미와 커다란 중요성을 증상에 부여한다.

신체 마비나 투통처럼 히스테리의 증상들은 주체가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억압 때문에 발생하지만 또 대립대는 힘들의 타협물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다음을 이것과 같이 말한다.

"둘로 나뉘었던 힘들이 증상들 속에서 다시 뭉친 것입니다.

그래서 증상 역시 저항을 할 수 있습니다."<정신분석 강의>,484쪽 

증상이 리비도의 충족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립된 힘들의 타협이라면 증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증상을 삶 속에서 주체성이 표출하는 실존적 징표처럼 긍정할 필요가 있다.

리비도야 말로 모든 활동과 승화의 원동력이고 다양한 무의식적 갈등의 원천이기 때문에 삶에는 반드시 증상이 있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처음에 증상이 정신적 충격이나 외상의 표현이라 보았으나 점차 증상을 억압된 것과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반복적인 강박증에서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증상은 심적 갈등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때로 증상 자체 자체가 엿설적으로 주체에게 만족을 주기도 하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쥐인간을 괴롭히는 쥐 고문에 대한 불안감은 실은 무의식적으로 품은 함문성애에 대한 집착과 이에 대한 방어 작용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하다.

하지만 증상을 무조건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욕망과 관련하여 제대로 이해하면서 증상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모든 무의식의 형설물은 억압된 것의 회귀와 실현이라는 면에서 무의식적 욕망과 관계가 있다.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프로이트가 관심을 가진 세계는 사물이나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세계이고, 욕망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생물학적인 소여나 유기체의 만족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프로이트가 욕망을 엄격하게 개념화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특정한 대상을 통해 해소되는 유기체적 욕구와는 거리가 있다.

프로이트는 욕망과 꿈에서 무대화하는 소원이 유아기에 근원을 둔 최초민족의 '기억흔적,memorytrace'에 연결되며 이 만족을 떠올리는 유사한 경험을 할 때 환상적 형태로 완수된다고 설명한다.

최초 만족은 절대 대풀이 될 수 없지만 언제나 환상을 통해 주체의 욕망을 끌어당긴다.

욕망이 환상과 결합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무대화하는 과정자체가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욕망이 과거 기억흔적과 현재 자극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심리적 인과성이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인 '사후작용, deferred action'을 통해서 작동한 다는 뜻이다. 

사후작용 논리에 따르면 과거 기억흔적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고 질료인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은 작용인처럼 작용하면서 주체를 사로잡는 욕망을 반복 속에서 되풀이하게 만든다. 

  욕망이 대상으로 잡는 대상은 언제나'심리적 현실,psychic reality' 속에서 만 의 미가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환상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이다.

환상은 만상과 다르며 주체의 욕망이 구성하는 현실이자 주체의 욕망이 펼쳐지는 장이다.

또 무의식에 시간이 없다는 것도 사후작용의 논리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사후 작용은 나중에 라캉에 이해 '누빔점, quilting point'8)이론으로 계승하면서 정교하고 개념화된다.

또한 데리다가 말하면 '차연,differance'개념, 즉 텍스트의 해석은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지연되면서 차이를 보인다는 이론과도 통한다

 

 7) 맺는말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성의 절대적 역할을 강조한 이래 정신분석학은 끊임없는 공격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의식은 억압을 통해 형성되는데 억압은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도덕적 가치와 이성적 판단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은 욕망과 생각을 의식에서 추방하는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것이 다시 돌아올 때 의식은 격렬하게 이를 부정하고 막으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성, 욕망, 공격성, 도착 같은 범주들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정신분석 담록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필영적인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된 것은 자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며 이성이 교묘하게 우리를 현혹하지만 무의식은 우리가 마주하기 싫은 또 다른 진실을 말한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깨우쳐준다. 진리는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의식에 경계를 잠시 늦춘다면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