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이방인으로서의 나. 카프카의 <변신> 읽기

바위처럼구름 2015. 5. 27. 11:43

2013년 4월 최윤영교수의 위 제목의 강의록 전문입니다



1.

이방인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할 때 이방인의 본질은 바로 낯섬이다. 독일어로 이방인은 "der Fremde"이다. 카프카를 해석할 때 특히 <변신 Verwandlung>(1912)을 해석할 때 이 낯섬을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레고르 잠자의 경험은 우선적으로는 당시 동화유대인의 경험으로, 확대해서는 현대인의 경험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현대인의 본질을 이방인으로 본 사회학자는 독일의 게오르그 짐멜이다. 그는 유럽의 이방인 유대인을 이방인의 대표자로 보며 이들은 "가깝고도 먼" 낯선 시선을 가지면서도 기동성, 객관성, 보편성의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방인은 자기 자신의 사회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가질 수 있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엣 가까움과 멂이 어떻게 통황되는지는 다음과 같이 이방인이라는 현상에서 매우 간결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 내부에 존재하는 거리란 가까운 사람은 실상 멀리 있음을 의미하며 이에 반해서 낯섦은 자연희 매우 긍정적인 관계,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툭수한 상호 작용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가난한 자들이나 당양한 내부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가 집단의 구성원으로소 내적으로 차지하는 지위는 이와 더불어서 아웃사이더와 적대자의 지위를 포함한다."(G.짐멜, 이방인. 실린 곳: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윤미애 역. 2005 새물결)


2.

카프카 작품의 공통적인 요소는 무소속성, 소외, 낯섬을 들 수 있다. "Identitat"는 원래"identisch"하다는 말에서 나왔고 정체성이라는 의역보다는 무엇과 무엇이 같다는 자기동일성이라는 직역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과 무엇이 동일한가? 자기와 동일한 대상으로 부모(자식), 형제, 소속, 민족, 종족 등의 개념등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은 자신의 몸과의 동일성이 중요하다. "프라하", "유대인", "작가"는 프란츠 카프카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부정적인 관계라 볼 수 있다. 즉 같다, 동일하다, 소속된다의 관계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무소속성, 비동일성의 관계가 그의 작품을 특징 짓는다. 즉 다시 말해서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유대인 작가로 산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라고 거의 대부분의 생을 살아간 도시 프라하에서 주류인 체코인이 아니었고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하였고 독일인(혹은 오스트리아인)도 아니며 이미 오래 전에 세속화된 가정에서 유대의 전통과 문화를 몰라서 찾아 헤맸고  전업작가로서 살고 싶었지만 내외의 압력 때문에 보험회사 사원으로 일하고 저녁에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소원은 무엇일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면서 글을 쓰면서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이란 확장한 지하실의 차폐된 제일 안쪽 공간에서 필기도구와 램프를 가지고 사는 것이오. 누군가 먹을 것을 가져 와 내 공간에서 멀리 떨어져 제일 바깥 문 뒤에다가 놓아주고. 그러면 나는 잠옷 바람으로 지하실 방을 모두 통과해 음실을 가지러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산책이 됙ㅆ지. 나는 내 책상으로 돌아와 천천희 경건하게 이것을  먹고 곧장 다시 글을 쓰기를 시작할거요. 그러면 뭘 쓰게 될까. 얼마나 깊은 곳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게 될까! 힘을 들이지 않고! 왜냐하면 극도로 긴장을 하면 힘든 줄을 모르니까."


그러나 이러한 삶은 동시에 간신히 동화되어 들어간 프라하에서의 안정된 직업과 중산층 삶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 이 추방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로마 함락 이후 2000년간 떠돌아다닌 유랑인들 유대인들의 소원은 어느 한 곳에, 어느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뿌리를 내리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곳에서 추방 당한다는 것은 뿌리 뽑힌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카프카 작품에서는 모든 작품들의 첫 문장이 중요하다. 첫 문장은 사실 작품의 전체적 배경과 설정, 인물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을 보여주고 이는 작품 말미끼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만 변(신)할 뿐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 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머리를 약간 처 들면 반원으로 된 갈색의 배가 활 모양의 단단한 마디들로 나뉘어져 있는 것들이 보였고, 배 위의 이불은 금방이라도 완전히 미끄러져 내릴것만 같아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나머지 몸뚱이의 크기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가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Als Grege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a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이 소설의 시작은 시공간적 배경은 "어느 날 아침", "침대 속"이다. 침대 속 어느 날 아침은 두 갈래로, 즉 일상의 세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모험과 꿈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일상의 세계 속에서 꿈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을 서로 엇갈려 오차 없이 조립해 놓았다. 꿈의 세계에서 갑충으로 변신했다면 자연스러웠겠지만 일상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이제 갑충으로 변신한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 주인공에게는 어제와 동일한 일상이 아니라 완전히 바뀐 다른 낯선 현실이 전개된다. 변신은 돌이킬 수 없이 이미 일어났고 결국 <변신>이야기는 이 변신한 상황에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적응해가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정반대의 현실의 맞물림, 그리고 결국 주인공의 변모, 변신하는 이야기는 그의 대표작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잠자는 갑충으로 변하기 이전에는 속칭 성공한 회사원, 현대인이었다. 실직을 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꾸리기 위해 그는 일반직 근무를 하지 않고 자원해서 출장 다니는 세일즈맨 일을 하게 된다. 그는 가외로 성과급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하여 집안의 빚도 갚고 넓은 집으로 옮겨 하녀까지 두는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누이동생에게 전문 음악교육을 시킬 수 있을 정도까지 된다. 그러나 그 삶은 그에게는 만족한 삶이 아니었다.


"아아! 이렇게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허구헌 날 출장이다. 이 일은 회사에서 하는 사무일보다 신경이 훨씬 더 많이 쓰인다. 또 여행하는 고역이 더해져 있으니 기차 편 연결에 대해 늘 신경을 써야하고 식사는 불규칙적이면서 질도 나쁘고, 만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절대 지속되는 적이 없으며 또한 진실하지도 않다. 악마가 이 모든 것을 가져가 벼렸으면!"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충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그에게 변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한편으로 변신은 현대의 성과사회에 매몰되어 버린 흉한 내적 모습에 대한, 즉 자기 소외된 존재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이에 대한 벌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유럽사회가 기생충으로 비유한 유대인의 부정적 이미지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변신을 억압된 소원의 성취와 구원의 계기와 연관시켜 해석할 수도 있다. 카프카는 항상 "육지에서의 배멀미"를 토로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 중 드물게 <변신> 2부에서는 벽과 천정을 기어 다니는 갑충으로서의 편안함,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심심풀이로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거어 다니는 슴관을 갖게 되었다. 그는 특히 천장에 매달려 있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게 하면 숨도 훨씬 편하게 쉴 수 있었고 온 몸에 가벼운 떨림이 지나갔다. 거의 편안한 방심상태이서 그리고르는 천장에서 자기 스스로 즐겁게 놀라게 하려고 몸을 떼어 방바닥에 털썩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자기 몸을 훨씬 더 잘 다룰 수가 있어서 그런 경우에도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다."


4.

글쓰는 것에 대한 집안 식구들의 반대는 예상한 것이었고 사실 실제의 당시 카프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반대 속에서 글을 계속 쓰고 있었고 오로지 가족 중에서 누이동생 오틀라만이 카프카의 글쓰기를 지지해 주었다. 성공한 중산층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기대는 아들이 작가로 전념해 살기를 어렵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카프카는 작가로서의 소망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추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가의 간절한 소망은 주인공에게 투사된다. 주인공은 가족과 사회의 기생충 갑충임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자신만의 삶에 몰두 할 수 있었고 내적 변신을 완성지었고 그 결과 동생의 연주에 처음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 변신한 잠자의 모습은 아래 대목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이전과 달리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잠자의 외적 추한 모습이 서술된다. 그러고르 잠자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누이동생이 연주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그 편에서 누이의 손을 쫓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연주에 매료되어 약간 앞으로 나아갈 엄두를 내어 어느새 머리를 거실에 들이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최근 들어 다른 사람들을 그토록 고려치 않게 된 사실도 거의 놀랍지 않았다. 전에는 그러한 조심성이 그의 자랑이었는데 말이다. 또 게다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몸을 숨겨야한 이유가 있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방은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사방으로 날리는 먼지가 가득하여 그 역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고 실오라기, 머리카락, 음식찌꺼기를 등과 옆구리에 질질 끌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전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랬듯이 벌렁 드러누워 양탄자에다 몸을 닦기에는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너무도 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인데도 그는 거실의 흠잡을 데 없는 바닥 위로 조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 절정의 장면이서 자기동일서의 철두철미한 추구는 그 절정에서 사회의 차가운 냉대와 맞부딪친다. 그로서는 가장 행복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행한 장면인 것이다. 드디어 가족과 하녀, 하숙인은 그를 참지 못하고 내쫓게 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변신'은 가족들의 변신도 주목하게 만든다.


"없어져야 해요." 여동생이 소리첬다. "아버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세요.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온 것이 우리들의 불행 이었어요. [....] 그런데 이 동물은 우리를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내쫓고, 온 집안을 차지하고서는 우리를 길에서 밤을 새게 하려고 해요."


잠자는 충격을 받고 가족들의 사정을 이해하면서 결국 삶을 놓아버리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는 행복감 속에서 죽고 동시에 세속적인 의무를 포기한 사회적 배제라는 결과를 받아들여 죽는다. 그레고르 잠자는 더 이상 자기 몸 앞에 낯선 자가 아니다.


5.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잠자가 자신을  낯익은 가정과 사회에서 벗어나 낯선 갑충으로 발견한 것은 유대인 작가로서의 특수한 경험으로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체험을 현대인의 삶에 적용시켜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현대라는 수레바퀴 안에서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이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이 익숙해진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우리는 낯설게 바라볼 수 있어야하지 않을지?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오리엔탈리즘>에서 중세의 휴고의 싯구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인류의 보편적인 상태로 즉 '인간의 조건 condition humana'으로 볼 뿐만 아니라 더 성숙한 상태로 보고 있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E,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2003 교보문고 453쪽)